서울시장 출마하는 우상호의 '1987'과 '2017' 그리고 '2018'

박은영 기자 | 기사입력 2018/03/09 [16:27]

서울시장 출마하는 우상호의 '1987'과 '2017' 그리고 '2018'

박은영 기자 | 입력 : 2018/03/09 [16:27]

▲ 7일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우상호 의원 북콘서트의 한 장면   

 

 

지난 7일 저녁 7시,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은 사람들로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찼고, 앞·뒤·옆 벽 쪽에도 사람들이 빈틈없이 서 있었다. 이들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의원의 북콘서트를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우 의원은 이날 자신의 저서 '세상의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면'을 소개하고 유년시절부터 1987년 6.10 민주항쟁, 작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들를 풀어놓았다. 민주당 이재정 의원의 사회로 우 의원 대학 동문이자 지금까지 죽마고우인 배우 ‘우현’ 씨와 작년 대통령 탄핵 당시 민주당 수석부대표를 맡았던 박완주 의원이 우 의원과 함께 인터뷰 형식으로 서로 대화를 이어갔다.

 

다음은 북콘서트 인터뷰 중 주요 내용이다.

 

 

이재정 : 우 의원의 어린 시절은 어땠나?

 

우상호 :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살다가 초등학교 6학년에 서울로 이사를 왔는데 서울 단칸방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공동수도에 공동화장실을 써서 아침에 볼일 보려면 발을 동동 구르며 10명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환경이었다, 집주인이 나가라고 하면 바로 비키니옷장 짐 싸서 이사가야 했다. 청소년 시절까지 가장 큰 고민은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였다. 

 

연세대 입학해서 쓴 일기를 보면 당시 등록금이 없었다. 당시 어머니가 갖고 있던 돈이 35만 원 정도였다. ‘아, 나는 대학을 합격한 것으로 만족하고 공무원 시험 봐야겠다. 그리고 나중에 형편이 되면 그때 야간대학이라도 들어가자’는 일기를 써놓은 게 있다. 그 경험에 비추어 공부를 하고 싶은데 등록금이 없어 대학에 못가는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국회에서 ‘반값등록금’을 외쳤었다.

 

이재정 : 우 의원은 군대에 다녀오고 나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우상호 : 1~2학년 때는 연세문학회 활동을 하면서 시인을 꿈꿨다. 그러다 박래군(현 인권재단 사람 대표)이라는 친구가 꼬셔서 군대 갔다 와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군대에 면회까지 와서 학생운동 하라고 꼬시는 친구는 처음 봤다. 저 친구랑 편지를 대여섯 통 이상 주고받으면서 ‘그래, 나는 나가면 문학의 꿈을 포기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재정 : 우 의원도 옥살이 경험이 있지 않나.

 

우상호 : 두 번 있다. 한 번은 한열이(이한열 열사)를 사망에 이르게 한 경찰들을 처벌하지 않아서 49제 때 항의방문을 갔는데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연행됐다. 그때는 연세대 총학생회장인줄 모르고 잡아갔다. 그때 우현이도 같이 잡혀가서 맞았다. 나는 학생회장이라 맞아도 고개를 숙일 수 없어서 “너는 뭔데 머리를 안 숙여”하며 헬멧으로 계속 때렸다. 남대문 경찰서에 끌려갔는데 “너 어디서 봤는데? 어? 연대 학생회장?” 이러면서 의자를 앉히더라. 당시 집회와 시위는 87년 6월항쟁으로 처벌하기 어려우니 뉴욕타임즈 기자에게 인터뷰했다는 이유로 국가모독죄로 감옥에 들어갔다.

 

 

이재정 : 2017년 촛불이 있던 해에 1987년 6·10 항쟁을 다시 되돌아보게 했던 영화 ‘1987’을 보며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우상호 : 첫 번째 드는 생각은 ‘이거 한열이 어머니가 보시면 안 되겠다’였다. 원래 잘 안 보시지만 전엔 내가 먼저 보시라고 했는데, 아예 보시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예전에도 후배들하고도 울면서 많이 이야기했는데, 총학생회장이 최루탄 맞고 쓰러졌어야 하는데 죄 없는 학생이 나를 대신해 맞았다는 죄책감으로 많이 괴로웠다. 죽어도 학생회장이 죽어야지, 평범한 2학년 학생이 죽었다. 30년 동안 어머니를 뵈면 괴롭고 죄송한 게 그거였다. 나를 1987년 6월항쟁의 주역이라고 하면 부끄럽다. 후배를 지키지 못한 학생회장으로 남아있어서 괴롭고 많이 울었다.

 

이재정 : 이한열 열사 30주기에 “정권교체로 이한열 열사의 꿈이 일부 이루어졌다”라고 소회를 밝혔는데 어떤 마음이었나?

 

우상호 : 작년 대선이 끝나고 당선이 확정된 날 밤에 전 혼자 한열이와 대화를 했다. “한열아, 잘했지? 이 정도면 된 거 아니냐? 30년이 지났지만...” 그런 얘기를 했는데 저한테는 정권교체가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1987년 한열이 죽고 1997년 대선에서 졌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1987' 영화 상영한 날, 대통령이 오셔서 한열이에게 작은 빚을 갚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재정 : 우 의원의 원내대표 시절, 국회는 탄핵을 이끌어냈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통해 촛불이 결실을 맺게 됐다. 그후 대선에 이르기까지 우 의원의 역할은 부정할 수 없다. 최순실 관련 제보를 7월부터 받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당시 원내상황은?

 

우상호 : 8월부터 제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처음엔 제보가 조각 조각 흩어져서 들어왔다. 의원들이 “이런 제보 들어왔어요”라고 해서 들어보면 제각각의 제보들이었다. 그땐 종합이 안 됐다. 그러다 제보들이 모이면서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제보를 받고 터트릴 수 있는 의원 6명으로 TF를 구성했다. 당시 대정부질의를 준비하면서 보니 결국 재벌들 돈을 뜯어낸 거였다. 그걸 먼저 터트리자 하고, 손혜원 의원이 예전에 광고 쪽에 있었기 때문에 차은택 씨 사건을, 안민석 의원은 승마비리를, 도종환 당시 의원은 이대 부정입학을 갖고 있었다. 결국 전략을 재벌 정경유착, 최순실의 국정농단, 개인비리 순으로 끌고 가면서 언론에 제보도 하고 분위기를 몰아가다가 승부는 국정감사로 잡았다.

 

주목도를 최대한 올려서 국감 첫날부터 최순실 게이트를 터트려나가면 언론에서 특별 취재단을 만들 것이다 생각하고 차근차근 진행했다. 당시 여당에서는 우리가 국감 때 그렇게 움직일 거란 사실을 알고 국감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보이콧했다. 그래서 단독으로 밀어붙이자고 했다. 국민의당 박지원 의원도 “원만하게 여야가 국정감사 해야지 단독으로 하냐, 미뤄라” 했는데 당시 여당이 물타기를 못하도록 밀어붙였다.

 

당시 청와대에서 이정현 당시 여당 대표에게 단독 국감이 되면 곤란하다며 국감에 들어가라 했는데 청와대 지시를 못 알아듣어 단독국감이 됐다. 그렇게 최순실 국정농단이 이슈화 됐고, 결정적으로는 JTBC가 태블릿PC를 증거물로 확보하는 바람에 촛불이 시작됐다. 그때만 해도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힐 거라 예상은 했으나 탄핵까지 갈 줄은 몰랐다.

 

▲ (왼쪽부터)더불어민주당 이재정 의원, 우상호 의원, 박완주 의원  



이재정: 탄핵으로 대중정치인으로 섰다. 정치인으로는 전환점이 되지 않았겠나. 탄핵을 주도하고 성공시킨 감회를 말한다면?

 

우상호 : 지나고 보니 사실은 똑같다. 1987년에도 6월 항쟁이 성공할 거란 확신을 가지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한 것이다. 탄핵 때도 정말 비장했다. ‘탄핵 통과 안 되면 난 국회의원 사퇴한다, 촛불 민심을 성공 못 시키면 내가 더 이상 국회의원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절박했다. 계산하지 않고 절박하게 하니 뭐가 되더라. 세상을 바꾸려면 자기의 모든 걸 걸어야 조금이라도 진전이 된다. ‘이거 안 되면 나는 다음에 뭐 해야지’ 이렇게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안 된다. 그때는 내 정치생명을 모두 걸었었다.

 

박완주 : 당시 국회가 탄핵소추안 통과 못 시켰으면 국회는 폭파됐을 것이다. 그 책임은 원내대표에게 있기 때문에 6월 항쟁의 버금가는 살 떨림이었을 것이다. 엄청난 중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여러 의원들과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지도자구나...’하고 느꼈다. 그땐 매일 매일 상황이 급변했고, 그걸 아주 강하고 꿋꿋하게 지켜나갔던 우상호 의원이 없었다면 조기대선도 없었을 것이다.

 

우상호 : 저는 지금도 감사한 게, 촛불민심 아니었으면 탄핵은 어려웠다.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 의원들 중에서 탄핵에 찬성한 그 명단은 나만 갖고 있었다. 명단이 새면 국정원과 청와대에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탄핵소추안에 찬성한 의원수는 제가 마지막으로 셌을 때 220표였다. 그런데 막상 까니까 234표가 나온 것이다. 예상보다 14표가 더 나왔다. 

 

그때 찬성한 새누리당 의원이 자기도 민간인 복장하고 마스크 쓰고 촛불현장을 가봤는데 자기 지역구의 보수를 지지하는 분이 와 있었다더라. 그 의원이 “선생님, 구경 오셨어요?”라고 물어봤더니 “난 박근혜 찍은 사람이고 새누리당원이지만 최순실 게이트만은 용서할 수 없다.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하셨다더라.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거다. ‘대표적인 보수 회장인데. 이게 민심이구나. 민주당원들만 앉아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당원도 와 있고. 지금 이 민심은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다’라고 생각하고 탄핵에 찬성하셨다. 대한민국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신 분들이 다 모여 있는 걸 보고 그 압박을 못 이긴 새누리당 의원들이 탄핵에 찬성표를 던졌다. 촛불은 민주당만의 것도 아니었고 진보진영만의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을 걱정하는 진보와 보수 모든 분들의 위대한 투쟁의 현장이었다.

 

이재정 : 마지막 갈무리 말씀을 부탁한다.

 

우상호 : 87년 6월 항쟁의 도전, 2017 탄핵과 대선의 도전은 나라를 바꿔야겠다는 일념으로 죽을 각오로 했었다. 저런 큰 역사적 격변이 있을 때마다 끝나고 나면 저는 “아아, 겨우 하나 끝냈다” 이런 정도의 한숨이 쉬어진다. 지도자를 하면 그런 거다. 성과가 좋다고 “와~ 좋네!” 이런 게 아니라 “아우, 큰일 날 뻔했네” 이런 마음이다.

 

나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것은 ‘저 높은 자리에 가서 권력을 누려봐야겠다’는 마음이 아니다. 촛불혁명에 나왔던 많은 국민들은 바로 새로운 세상을 원하고 있는데 새로운 세상은 정책을 바꿔야 만들어질 수 있다. 대통령이 바뀌니까 남북관계도 좋아지고 평창올림픽도 성공하지 않았나.

 

만약 2012년에 대선을 했으면 평창 올림픽 개회사는 박 전 대통령이 하게 됐을 것이다.그러면 북한은 올림픽에 안 왔을 것이고 문재인이 당선됐다 하더라도 지금 같은 약간의 변화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서울은 어떻게 할 것인가’, ‘세계 주요도시에서 행복지수가 꼴찌인 서울을 이대로 놔둘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시장이 돼야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서울을 바꿔야겠다는 절절한 마음이다. 두 번 세상을 바꿨던 사람이 서울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여기에서 던지고 있는 것이다. 열심히 해서 시민들에게 ‘새로운 사람이 하니까 내 삶이 바뀐다’ 하는 체험을 하게 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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