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말띠가 드세다고요? No! 우린 세상 착한 ‘구공백말띠’

박은영 기자 | 기사입력 2018/11/08 [14:38]

백말띠가 드세다고요? No! 우린 세상 착한 ‘구공백말띠’

박은영 기자 | 입력 : 2018/11/08 [14:38]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말띠 해에 태어난 여자는 드세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중 백말띠는 말띠 중에서도 가장 기가 세고 사납다고 전해진다. 그 말의 유래를 찾아보면 ‘백(白)’은 동양의 오행으로 따졌을 때 ‘금(金)’에 해당하는데 금은 강한 권력을 상징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백말띠는 활동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말의 습성에 강한 권력욕까지 덧붙여진 꼴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여성상과는 배치되는 것으로, 백말띠 여성에게는 자연히 부정적인 이미지가 씌워진 것이다.

 

▲ 백말띠로 태어난 1990년생들     © 사진출처:구공백말띠

 

여기 드세고 사납다는 백말띠 남녀 5만3천여 명이 모여 있는 곳이 있다. 바로 1990년생 백말띠들의 커뮤니티인 ‘구공백말띠’다. ‘구공백말띠’에 모인 이들은 태어나면서 붙은 ‘드센 백말띠’라는 꼬리표에 자부심을 갖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드센 여자’는 더 이상 흠이 아닌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멋진 여성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받은 남다른 시선이 지금은 자신들만의 ‘특별한 존재감’이 된 것이다.

 

‘구공백말띠’는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인 2013년 11월, 일명 ‘학생회장’이라 불리는 김건우 씨가 SNS 공간에 커뮤니티를 만들면서 시작됐다. 김씨는 2014년 말띠 해를 앞두고 동갑내기 친구들이 함께 모여 ‘우리의 해’를 의미 있게 맞이하면 좋겠다는 발상으로 신년파티를 계획하며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게 됐다.

 

동갑내기 오지탐험가이자 작가인 유지성씨, 삼성라이온즈 김상수 선수가 함께 했고 동갑은 아니지만 재즈피아니스트 진보라 씨가 참석해 노래와 강연, 이야기가 있는 첫 신년파티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 2014년 신년파티를 찾아준 삼성라이온즈 김상수 선수(좌)와 재즈피아니스트 진보라(우)     © 사진출처:구공백말띠

 

이후 SNS를 통해 계속해서 추억과 감수성, 그리고 그들만의 고민들을 공유하며 팔로워가 늘어가기 시작했다. ‘구공백말띠’는 비록 온라인 공간에서 만나긴 했지만 그들만의 공감과 위로로 서로를 보듬어주는 좋은 친구가 됐다. 이들이 어렵사리 꺼내놓은 고민들, 이제껏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에 친구들의 응원의 댓글이 수백 개씩 달렸고 서로를 위하는 따뜻한 마음이 결국은 ‘일’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구공백말띠’는 서로의 고민을 그저 위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사연들을 모아 이를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이들에게 넘겨주기로 결심했다. 당시 27세였던 이들의 고민들을 A4용지 40장에 빼곡히 채워 ‘스물일곱 하얀말의 회초리’라는 이름으로 국회 각 정당에 전달한 것이다. 

 

각 정당의 반응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당시 새누리당 신보라 의원을 시작으로 각 정당에서 연락이 왔다. 결국 각 당 의원들과 라이브방송을 통해 이들의 고민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다. 비록 속 시원하게 해결된 사안은 없지만 자신들의 고민이 국회에 전달되고 의원들이 반응을 보인 것만으로도 굉장히 기뻤다. 그렇게 그들은 말과 글뿐만이 아닌 행동으로 서로를 위로했다.

 

▲ 각 당 국회의원들과 함께 한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 '스물일곱 하얀말의 회초리'     © 사진출처:구공백말띠

 

2016년 10월 ‘구공백말띠’는 서울 봉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300명 규모의 첫 운동회를 열었다. 온라인에서의 교류가 대부분이던 친구들과 오프라인에서 만나 초등학교 때 했던 운동회를 재현해보는 것이었다. 어떤 면에선 굉장히 실험적인 프로젝트였다. 운영진들은 ‘얼굴도 모르는 친구들이 과연 신청을 할까?’, ‘모여도 서로 서먹해 하다가 끝나지 않을까’하며 성공적인 운동회를 점치긴 어려웠다. 그러나 이는 기우였음을 그들은 금새 알게 됐다.

 

운동회를 위해 스텝을 모집했는데 120명이 신청했다. 그렇게 뽑은 스텝들은 밤마다 모여서 자기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프로그램을 짜고 포스터를 만들고 행사를 준비했다. 운동회 참가자 300명을 선착순으로 모집했는데, 참가신청을 받기 시작하고 3시간 만에 모두 마감됐다. 그저 놀람의 연속이었다.

 

운동회 당일엔 ‘친구들이 정말 올까’ 하는 스텝들의 의구심을 무참히 깨부수듯, 이날의 드레스코드인 하얀색 옷을 입은 친구들이 인근 지하철역 출구로 쏟아져 나왔다. 굳이 어디로 가야할지 묻거나 찾지 않아도 하얀 티셔츠의 행렬을 따라가다 보면 운동회 장소에 도착할 정도였다. 

 

이날은 스텝들부터 "반가워 친구들아, 오랜만이야"라고 인사를 건냈다. 그렇게 오랜 친구들처럼 인사를 건내고 나니 서로 어색함이 사라지고 스스럼없이 대했다. 애국가 제창, 국민체조, 반장·부반장 선거부터 시작해서 큰공굴리기, 박 터트리기, 줄다리기, 육인칠각, 릴레이 등 추억의 게임들을 하면서 이들은 끈끈해졌고 누구보다도 애틋한 사이가 됐다. ‘그래, 우린 태어났을 때부터 친구였어’라는 이들의 캐치프레이즈처럼 말이다.

 

▲ '구공백말띠'의 2016년 첫 운동회     © 사진출처:구공백말띠


이들의 운동회에서 승부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분명 우승팀과 꼴찌팀이 있지만 일등을 하든 꼴등을 하든 모두에게 박수와 환호, 진심어린 응원을 보냈다. 이날 참석자 중에는 어릴 때 예방접종을 잘못 받아서 반신마비가 된 친구가 있었다. 공도 차고 신나게 뛰어 놀고 싶었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왕따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런 그도 ‘구공백말띠’ 운동회에 오면 함께 뛰어 놀 수 있는 친구들로 가득했다. 모두가 그를 응원하고 함께 기뻐해줬다. 

 

이들에겐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왔든, 어떤 직업을 갖고 있든 그런 건 중요하지가 않았다. 그저 운동회 시간만큼은 사회에서 겪어야만 하는 경쟁과 비교를 잊고 친구들과 즐겁게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가득했다. 그렇게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하고 함께 하다 보면, ‘아,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이 친구도 힘들구나’, ‘이 친구는 이런 방법으로 극복하려고 하는구나’ 하고 어느새 진지하게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돼 있다.

 

▲ '구공백말띠'의 2017년 2018년 운동회 모습     © 사진출처:구공백말띠

 

벌써 운동회는 올해까지 총 3번이 치러졌다. 지난 운동회 때 처음 봤던 친구들을 1년 만에 다시 보는데도 그저 반갑게 얼싸안으며 안부를 물었다. 어떤 친구는 1년 내내 운동회만 기다리며 살았다고도 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던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온 듯한 기분에 이들은 그저 행복할 따름이었다.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란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 걸까? 올해 운동회에선 박 터트리기를 할 때 던진 콩 주머니가 바느질이 허술했는지, 다 터져서 콩이 운동장 사방에 흩어져버렸다. 이들은 흥겨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다가 갑자기 모두 바닥에 주저앉아 콩을 줍기 시작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말이다. 운동회가 끝난 그 넓은 운동장엔 쓰레기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더랬다. 

 

운동회는 그저 운동회로 끝이 아니었다. 운동회 때 같은 팀이었던 친구들끼리 자발적으로 봉사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달동네 연탄 나르기 봉사도 하고, 군산에 농부인 친구는 직접 재배한 쌀 300kg을 보내오기도 했다. 그 쌀과 함께 친구들이 모은 생필품을 가평 꽃동네에 전달하기도 했다.

 

▲ 운동회가 끝나고 '구공백말띠' 친구들이 함께 한 봉사활동     © 사진출처:구공백말띠


그런데 어쩐 일인지 운동회가 끝나고 참석한 이들 중 47명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그저 초등학교 운동회를 재현했을 뿐, 직업에 대한 이야기나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퇴사한 친구들은 운동회에 참가하면서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며 “어릴 적 내 꿈이 뭐였지?”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어렸을 땐 장래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자신의 미래를 마음껏 펼쳐놓는 희망찬 일이었는데, 지금은 스트레스이고 비교가 돼버렸다. 그렇게 꾹꾹 접어두고 묻어두었던 자신의 꿈이 운동회를 통해 다시금 생각났던 것이다. 그렇게 운동회는 이들에게 커다란 의미로 와닿았다.

 

벌써 ‘구공백말띠’가 시작된지 어언 5년이 다 돼간다. 어느 샌가 이들에게 ‘구공백말띠’는 자부심이 됐다.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모임의 순수성을 지켜나가고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간다는 것이 이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해준다. 이들의 SNS 공간에는 비속어 하나 없고 다른 커뮤니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고 하나 없다. 오직 서로에 대한 응원과 애정이 가득할 뿐이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주변을 살펴보면 동갑내기가 별로 없는 것 같이 느껴진다. 있다 하더라도 일적인 관계로 만나 친구처럼 지내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구공백말띠’에서는 모두가 친구이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를 받게 된다. 세상이 빠르게 발전할수록 인간이 느끼는 공허함은 커져가지만 ‘구공백말띠’ 친구들이 있기에 각박해져가는 마음이 촉촉해진다. 잊고 있던 가치를 다시금 고민하고 삶의 동력을 찾게 된 것, 이것이 ‘구공백말띠’의 자부심이자 존재의 이유이다. “그래, 우린 태어났을 때부터 친구였어!”

 

▲ '구공백말띠'의 캐치프레이즈 '그래, 우린 태어났을 때부터 친구였어!'     © 사진출처:구공백말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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