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조선 땅, 최초로 디딘 서양인 '세스페데스' 신부와 황금십자가의 비밀

박인수 기자 | 기사입력 2018/12/30 [06:48]

[기획] 조선 땅, 최초로 디딘 서양인 '세스페데스' 신부와 황금십자가의 비밀

박인수 기자 | 입력 : 2018/12/30 [06:48]

한국 땅을 최초로 밟은 서양인은 네덜란드 태생의 헨드릭 하멜(1630~1692)로 알려져 있다. 그는 1653년 상선 스페르버르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 부근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어 제주도로 닿게 된다.

 

제주도에서 몇 개월간 억류돼 있다가 일행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된 하멜은 1666년에 조선에서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 후 1668년 네덜란드로 겨우 송환되어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13년간 조선에서 겪은 일들을 담아 하멜 표류기’, ‘조선왕국으로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조선에 대한 지리, 언어, 풍속 등을 유럽에 소개하는 가장 대표적인 책이 됐고, 그 영향력 때문인지 중요한 인물로 평가돼 하멜은 최초로 한국땅을 디딘 서양인으로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그보다 60년이나 앞서 조선 땅을 밟은 이가 있었으니, 스페인 출생의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1551~1611년, Gregorio de Cespedes)신부다. 그는 1569년에 살라망카의 예수회 신학교에 입학했고, 이 후 알레한드로 발리그나노를 따라 인도의 고아 지방으로 건너갔다가 1577년 일본으로 들어가 오오무라, 미야코, 코키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1585년에는 오사카에서 수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방문을 받았다. 1587년에는 히라도, 시마하라 주변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 세스페데스 신부가 첫 발을 디딘 '사도마을의 탕수바위'     © 뉴스다임 박인수 기자

 

일본이 조선을 공격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스페데스 신부는 천주교인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요청으로 그의 휘하에서 종군으로 나가사키에서 출발, 대마도를 거쳐 15931227일에 조선에 도착(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소재)해 선교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일본의 적이었던 조선인들에게도 선교활동을 했기 때문에 활동의 제약이 많았는데 비밀리에 외지로 나간 것이 발각돼 1년여 만에 일본으로 귀국해 처벌받을 뻔했지만 고니시 유키나가 덕분에 위기를 넘긴다.

 

성직자로 누구의 편이 아닌 동등한 인류애(人類愛) 일본으로 잡혀 온 조선인 2천여 명에게 세례를 주며 가톨릭 신자로 만들었으며, 시마하라, 고쿠라 등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1611년에 사망했다.

  

그는 조선에 머물며 4통을 서신을 보냈고, 일본으로 돌아가서는 5통의 서신에서 조선을 소개했다. 서신에서 처음으로 조선을 꼬레이(Coray)로 표기했으며 이는 서양의 선교사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를 긍정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또한  제3 서신에서는 임진왜란을 직접 지켜보며 조선 땅에서 본 죽음, 질병, 기아 등을 고발하며 평화협정에 관해 상세히 적고 있다. 이는 당시 조선의 분위기와 전쟁상황을 조금이마나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 됐다.

 

임진왜란은 모두가 원치 않는 전쟁이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모함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 서신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것으로 표현하며 모든 면에서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남산 정상의 웅천왜성 성곽     © 뉴스다임 박인수 기자

 

세스페데스 신부가 1년 동안 머물렀던 곳은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옛지명 웅천)이다. 남문동에 있는 남산 정상에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된 웅천왜성이 있다. 웅천왜성은 일본식으로 건축된 성곽을 유지하고 있다.

 

▲ 웅천왜성을 설명하는 내용이 적혀 있는 안내 표지판   © 뉴스다임 박인수 기자

 

이곳에서 일본어가 능통했던 세스페데스 신부는 천주교 병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영세를 베풀었다. 천주교인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 왜장의 요청으로 웅천왜성에서 최초의 미사를 드리게 되면서 종교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 됐다.

 

▲ 지방 기념물 제19호 '웅천왜성'     © 뉴스다임 박인수 기자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에 도착했을 때 당시 조선은 전략상으로 일본군을 고립시키기 위해 일본군이 점령한 성들의 주변을 완전히 파괴하고 공터로 만들어 놓았다. 따라서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의 주민들과 접촉할 수 없었다.

 

또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말을 건넬 수조차 없어 선교 활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세스페데스 신부와 관련해 또 다른 재밌는 일화가 있다. 불교신문이 보도한 2016년 11월 8일 기사에 따르면 대원사 티벳박물관장 현장스님이 201611월 4일 개최한 해남 대흥사에서 열린 학술세미나에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 최고의 고승 서산대사와 조선을 찾은 세스페데스 신부가 직접 만나 각자 지니고 있던 종교상징물인 황금십자가와 수정염주를 교환했다고 주장했다.

 

▲ '매일신보'에 보도된 대흥사 황금십자가 관련 기사. <불교신문> 발췌     © 뉴스다임 박인수 기자

 

학술세미나에서 현장스님은 해남 대흥사에 서산대사 유물로 전해지는 황금십자가의 비밀이란 주제로 발표에 나서 조선 최초로 전해진 십자가가 서산대사 유물이라는 사실은 한국의 종교 교류역사에서 특이한 일로 기록이 없어 추정만 무성하다서산대사가 황금 십자가를 갖게 된 것은 사명대사설, 하멜전래설, 민간전래설, 선조임금 하사설, 세스페데스 전래설 등 다양한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현장스님은 지리산 실상사 불상 복장유물에서 400여 년전 기독교 전례서인 성무일도서가 출현한 것으로 보아 이 책과 황금 십자가는 당시 조선을 찾은 세스페데스 신부의 것으로 추정된다서산대사와 세스페데스 신부가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자신이 지니고 있던 황금십자가와 수정염주를 교환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세스페데스가 성직자가 될 당시 16세기 스페인의 사회는 기독교 절대주의 시대로 종교문학이 꽃을 피웠으며 모든 분야에서 반종교개화 운동으로 더욱 교권이 절대권을 행사하던 시기였다.

 

당시 신부계급은 정치, 사회,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는 식자계급으로 스페인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따라서 세스페데스 신부의 경우도 성품뿐 아니라 수준 높은 학식을 갖춰 예수회에 입단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장 우수한 인재들만 엄선해 극동 등 해외로 선교활동을 목적으로 파견했던 시기였다.

 

▲ 경남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에 위치한 '세스페데스 기념공원'. 2015년 11월30일 문을 열었다.     © 뉴스다임 박인수 기자

 

▲ 세스페데스 공원 내 '방한 400주년 기녕비'     © 뉴스다임 박인수 기자

 

▲ 세스페데스 400주년 기념비 문구     © 뉴스다임 박인수 기자

 

세스페데스 신부의 고향인 스페인 톨레도의 비야누에바 데 알카르데테 시민들이 세스페데스 방한 400주년 기념비를 헌정했으며,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에 세스페데스 기념공원이 세워졌다.

 

공원을 조성할 초기에 일부에서는 일본 종군으로 온 그를 추모하는 공원을 창원시에서 시비로 조성하는 것과 가톨릭에 해당되는 작은 사건으로 치부하며 공원조성사업을 반발하는 이견들이 있었다.

 

그러나 세스페데스 신부의 일본 종군은 그의 종교적 신념과 성직자로서 활동을 유추해 볼 때 조선 선교를 목적으로 들어오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었다는 것을 그의 서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유추해 볼 때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 땅을 디딘 최초의 서양인이자 조선을 서양세계에 긍정적으로 소개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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