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난민 출신 ‘조셉 김', 부시 대통령 인권센터 보좌관 됐다

Julie Go 기자 | 기사입력 2019/02/08 [04:42]

탈북난민 출신 ‘조셉 김', 부시 대통령 인권센터 보좌관 됐다

Julie Go 기자 | 입력 : 2019/02/08 [04:42]

 

2007년 탈북난민으로 미국에 입국한 조셉 김 씨가 14일 부시인권센터에 정식 직원으로 합류했다.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에 따르면 부시 전 대통령이 2004년 서명한 ‘북한인권법’이 통과된 후, 2006년부터 탈북난민의 미국 입국이 시작됐는데 당시 김 씨는 중국 내 미국 외교공관에 진입한 탈북자였다.

 

김 씨는 중국 내 기독교인과 미국의 탈북자 구출단체 링크의 도움으로 중국 심양주재 미국영사관의 보호를 받은 지 4개월 만인 2007년 2월 15일 미국에 입국했다.

 

소학교 수업이 교육을 받은 전부였던 16살 탈북 청소년은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의 공립고등학교에서 미국인 가정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고, 뉴욕의 ‘보로 단과대학’에서 ‘바드 칼리지’로 편입해 정치학도가 됐다.

 

김 씨가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13년 테드 강연 무대였다. 김 씨는 이 강연에서 북한에서 꽃제비로 살아야 했던 상황과 가족에 대한 가슴 아픈 이야기, 그리고 미국에서 대학교에 들어가기까지 경험담을 말했다.(아래 전문) 

 

김 씨의 이야기는 미국 정부와 국제사회의 북한인권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였던 당시, 유명 언론인이자 작가인 스테판 탈티 씨의 제안으로 출간된 자서전을 통해서도 세상에 알려졌다.

 

김 씨는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을 여러 차례 만난 바 있고, 부시 인권센터의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 가을 부시 인권센터에서 직원을 채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김 씨는 이력서를 보냈고, 11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심사를 받은 후 채용됐다.

 

김 씨는 지난 14일(월)부터 부시 인권센터에서 ‘인권담당 보좌관’(Assistant Human Freedom)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테드 강연 링크)

https://www.ted.com/talks/joseph_kim_the_family_i_lost_in_north_korea_and_the_family_i_gained?language=ko

 

(강연 내용 전문)

00:00
저는 북한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저희 가족은 항상 가난에 시달렸지만 저는 언제나 사랑과 관심을 가장 많이 받았어요. 외아들이자 두 자녀 중 막내였거든요.
00:18
그런데 1994년에 대기근이 닥쳤습니다. 당시 저는 네 살이었어요. 누나와 저는 새벽 다섯 시부터 땔깜을 찾아다녔고 자정이 넘어서 돌아오고는 했습니다. 음식을 찾아 길거리를 헤매고는 했는데, 한 번은 엄마 등에 업힌 아기가 과자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걸 훔쳐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요.
00:44
굶주림은 모욕입니다. 굶주림은 절망입니다. 배고픈 아이는 정치와 자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아홉 번째 생일에 부모님은 제게 아무런 음식도 주지 못하셨습니다. 당시 저는 아이였지만, 부모님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느낄 수 있었어요.
01:08
그 시기에 100만 명 이상의 북한주민이 아사했습니다. 그리고 2003년, 제가 13살 되던 해, 제 아버지도 같은 운명을 맞이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말라가고 결국에는 돌아가시는 모습을 지켜봤어요. 같은 해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사라지셨고 누나는 저에게 돈을 벌러 중국에 가는데 돈과 음식을 가지고 곧 돌아오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고 영원히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누나가 떠날 때 안아주지도 않았어요. 그건 제 생애 최대의 실수였습니다. 그렇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이렇게 오래 헤어질 줄 몰랐어요. 그 이후, 저는 어머니나 누나를 본 적이 없어요.
02:01
순식간에 저는 집 없는 고아가 되어버렸습니다. 일상은 아주 힘들어졌지만 동시에 매우 단순해졌어요. 쓰레기통에서 먼지 투성이의 빵조각을 찾는 게 목표가 되었죠.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구걸 또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암시장의 식품 수레에서 훔치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소일거리를 해주는 대신 음식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겨울에 두 달동안 탄광에서 일을 했는데,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지하 33m 되는 곳에서 하루 최대 16시간씩 일을 하기도 했죠. 하지만 제가 특별한 건 아니었어요. 많은 다른 고아들도 이런, 혹은 이보다 더한 방식으로 살아남았습니다.
02:56
너무 춥거나 배가 고파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에는 다음 날 아침에 누나가 돌아와 저를 깨우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가져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런 희망이 저를 살렸습니다. 큰, 거창한 희망이 아니라 제가 말하는 희망은  다음 쓰레기통에는 빵이 있을 거라는 믿음을 준 희망입니다. 빵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하더라도요. 하지만 그런 믿음 없이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테고 그러면 저는 죽고 말았겠죠. 희망이 저를 살렸습니다. 저는 매일같이 다짐했습니다. 삶이 아무리 힘들어질지라도 '나는 살아야한다'고요.
03:43
누나가 돌아오기를 3년이나 기다린 끝에 중국에 직접 가서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는 오랜 못 갈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가는 길이 위험할 줄 알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목숨이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였어요. 북한에서 아버지처럼 굶어죽거나, 아니면 중국으로 탈출해서 더 나은 삶을 찾아보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04:15
많은 사람들이 발각되지 않기 위해 중국 국경을 넘기 위한 시도를 밤에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북한 국경 경비대는 허가 없이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들을 종종 쏘아 죽이고는 합니다. 중국 공안은 탈북자들을 잡아 송환하고, 그런 탈북자들은 무거운 처벌을 받습니다. 저는 대낮에 국경을 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유는 첫째, 그때는 어려서 아직 어두운 게 무서웠고, 둘째는 어차피 위험을 감수하는데 낮에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많지 않으니까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탈북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05:01
저는 2006년 2월 15일에 중국 땅을 밟았습니다. 당시 16살이었죠. 중국에 가면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일단은 먹을거리가 더 많았으니까요. 더 많은 사람들이 저를 도와줄거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삶은 북한에서보다 더 어려웠습니다.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에요. 혹시 잡혀서 북한에 돌려보내질까 항상 초조했습니다.
05:27
하지만 몇 달 후, 기적처럼 탈북자들을 위해 비밀 보호소를 운영하는 사람을 만나 그곳에서 살면서 수년 만에 처음으로 정기적으로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말, 한 활동가의 도움으로 중국을 탈출해 난민 자격으로 미국에 오게 되었어요.
05:52
영어 한 마디도 못하는 채로 미국에 왔지만 제 사회복지사는 제가 고등학교에 가야한다고 했어요. 사실 북한에서도 저는 늘 꼴찌 학생이었습니다. (웃음) 초등학교도 간신히 마친 데다가, 하루에 한 번 싸움질을 했어요. 저는 교과서와 도서관 체질이 아니었죠. 아버지께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여러 수를 쓰셨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포기하셨습니다. "넌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 라고 하셨어요. 11살인가 12살 밖에 안됐었지만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까지도 공부에 대한 동기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미국까지 와서 고등학교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죠. 중학교도 안 다녔는데 말이에요. 결국 가야한다고 하니까 가기는 했는데 별로 열심히 다니지는 않았어요.
06:56
하루는 집에 돌아왔는데 양어머니께서 치킨윙 요리를 해주셨어요. 저녁 식사 중에 날개를 하나 더 먹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더 못 먹을까봐 안 먹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제 접시를 보니 양아버지께서 자신의 것을 갖다놓으신 겁니다. 정말 행복했어요. 양아버지께서 제 옆에 앉아 계셨는데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았지만 아주 따뜻한 눈길로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갑자기 저의 친아버지가 생각났어요. 양아버지의 작은 사랑의 행동이 제 아버지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낌없이 제게 음식을 나눠주셨습니다. 자신이 배고프고 굶주리실 때도 말이죠. 저는 미국에서 이렇게 많은 음식을 먹고 있는데 제 아버지께서는 기아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숨이 막혔습니다. 그날 밤, 제 유일한 소원은 아버지께  밥상을 차려드리는 것이었어요. 또한 저는 아버지를 기릴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을지 궁리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다른 결론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미국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받아 아버지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어요.
08:16
학교를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고 생애 처음으로 성적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첫 학기에 우등생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08:30
(박수)
08:38
그 치킨 날개 하나에 인생이 바뀐 거죠. (웃음)
08:45
희망은 개인적인 겁니다. 희망이란 그 누구도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을 믿기로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해요. 스스로 일구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혼자 살아남았지만, 미국까지 저를 데려온 것은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미국에 오니 뭘 해야할지 몰랐습니다. 너무 많은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이죠. 그 저녁 식사 때 양아버지는 제게 방향을 제시해 주셨고, 그와 함께 미국에서 살아야 할 동기와 목적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09:23
저는 혼자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희망이 있었지만 희망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생존을 스스로에게 강요해야 하고, 생존하기 위해 희망도 필요하지만 도움 없이 혼자 해낼 수는 없습니다.
09:49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입니다. 스스로를 위해 희망을 가지면서도 서로 도와주세요. 어디에 살든, 삶은 힘들 수 있습니다. 양아버지는 제 삶을 바꾸려는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잖아요. 이처럼 여러분도 사랑에서 비롯된 작은 행동으로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빵 한 조각은 배고픔을 달랠 수 있고 희망을 가지면 목숨을 연명할 빵을 찾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확신하건대 여러분의 따뜻한 손길과 관심은 또다른 조셉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고 생존을 위한 희망을 가지는 수천 명의 또다른 조셉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10:47
감사합니다.
10:48
(박수)
11:24
아드리안 홍: 조셉 씨, 이토록 개인적이고 특별한 이야기를 저희와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에 누나를 본 지 거의 딱 10년이 되어간다고 하셨는데, 아주 만약에 누님이 이 영상을 보실 수 있으니 누님께 영상 메세지를 띄울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 싶습니다.
11:42
조셉 김: 한국어로요?
11:43
홍: 영어로 하시고 한국어도 하세요.
11:46
(웃음)
11:50
김: 한국어로는 더 못할 것 같습니다. 한국어로 하면 자꾸 눈물이 나서요.
11:59
누나, 내가 누나를 본 지 벌써 10년이나 됐네. 그냥 보고 싶고 사랑한다고 하고 싶었어. 제발 돌아와줘. 그리고 살아있길 바래. 그리고... 아, 정말 누나를 볼 거라는 희망을 아직 가지고 있어. 난 누나 볼 때까지 행복하게 살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게. 그리고 앞으로 절대 울지 않을게. (웃음) 그냥 누나 볼 날만 기다리고 있고, 누나가 날 못 찾으면 내가 누나를 찾고 있을테니까 언젠가는 볼 날이 있을거야. 어머니께도 한 마디 해도 될까요?
13:03
홍: 네, 물론입니다.
13:05
김: 엄마와 보낸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아직 저를 사랑하고 아직도 저를 위해 기도하시고 제 생각하고 계신다고 믿고 있어요. 그저 저를 이 세상에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13:23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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