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78주년 광복절을 맞아 순국선열 유적지를 찾다①서울 덕수궁 중명전과 서대문형무소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어 독립했고, 3년 뒤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난 날과 독립국으로서 정부가 수립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 매년 8월 15일을 광복절(光復節)이라 하고 국경일로 지정했다. '광복'이란 '빛을 되찾다'는 뜻으로 잃었던 국권의 회복을 의미한다.
올해 8월 15일은 광복 78주년이다. 1910년 경술국치로 시작된 36년간의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날이고 남북분단이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광복절이 돌아오면 기쁨도 있지만 우리가 하지 못한 것에 대한 고해성사도 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전국과 서울 곳곳에는 일제 강점기에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투쟁하다가 순국한 애국지사와 관련되어 있는 역사적인 장소가 많다. 잊어서는 안되는 장소와 순국선열을 기억하며 찾아가고 기록하는 것은 또 다른 나라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평등 조약인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던 '덕수궁 중명전' 먼저, 낭만과 추억이 서린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가면 을사늑약이 일어났던 덕수궁 중명전이 있다. 을사조약(乙巳條約, 1905년 11월 17일)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일제가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다.
이 조약은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제국의 주한 공사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되었다.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불평등 조약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우당 이회영과 6형제는 조선최고 가문의 모든 것을 버리고 중국의 서간도로 이주해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운다. 경학사는 밭을 갈며 공부한다는 뜻이고 후일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나 수많은 항일전투의 선봉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있었다.
'난잎으로 칼을 얻다'는 전시회( 우당 이회영과 6형제, 2014.11.17.~2015.3.1) 제목처럼 난을 치고 그것을 팔아 군자금을 마련하는 등 이회영 선생과 형제들은 조국독립의 길에 쓰러져 갔다. 오블리스 오블리제를 넘는 위대한 발자국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식민통치 저항하는 운동가들 투옥하기 위해 만든 '서대문형무소' 다음은 서대문 독립공원 내에 위치해 있는 서대문형무소다.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 'Former Seodaemun Prison, Seoul')는 일제 통감부가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운동가들을 투옥하기 위해 1907년에 오늘날의 서대문구 지역에 건설해 1908년 10월에 문을 연 감옥이다.
해방 후에는 주로 서울 구치소라 불리며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었다. 서울 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1987년 10월에 폐쇄되었고, 그 후로 역사성과 보존가치 등을 고려해 일부 시설을 철거한 뒤 나머지 시설들이 1988년 2월 27일에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98년 11월 5일부터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가 관리하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재개장했으며, 1992년부터는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한 독립공원의 주요시설로 기능을 하고 있다.
서대문형무소는 강우규, 권오설, 김구, 김경천, 박진홍, 신채호, 안창호, 양전백, 유관순, 윤봉길, 이관술, 이효정, 이순금, 이회영. 백정기, 차금봉 등 수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에서 고문을 당하고 순국했다.
서대문형무소에 있는 독립공원에는 독립문과 서재필 박사 동상, 순국선열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현충사 및 순국선열 추념비 등이 있다. 서대문 독립공원은 전철 3호선 독립문역에 하차하면 바로 위치해 있어 가족들이 함께 둘러보며 순국선열이 남긴 조국사랑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참 좋는 곳이다.
강우규 의사 동상이 있는 서울역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국한 강우규 의사의 동상은 서울역에 있다. 강우규 의사는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를 폭살하기로 결심한다. 드디어 결전의 날인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에서 사이토의 마차에 폭탄을 던진다. 하지만 총독을 암살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핵심인물들인 무라다 육군소장, 혼마치 경찰서장 등이 중경상을 입었다.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일본군과 경찰들에게 암살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공포심을 불러 일으킨다. 폭탄을 투척한 후에 피신을 하던 그는 일제 경찰에 복무한 김태석에게 체포된다.
강우규 의사는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구서울구치소)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1962년 추서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직전에 남긴 그의 사세시(辭世詩)를 읽어보자.
*왈우 강우규 의사 사세시(辭世詩) "단두대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 순국 직전 남긴 유시(留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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