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와 보물, 그리고 식민사관

정의정 기자 | 기사입력 2019/09/23 [11:36]

국보와 보물, 그리고 식민사관

정의정 기자 | 입력 : 2019/09/23 [11:36]

우리나라의 국보 제1호는 남대문(숭례문)이고, 보물 제1호는 동대문(흥인지문)이다. 이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적 1호는 무엇일까? 아마도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사적 1호는 바로 경주에 있는 포석정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재 분류 체계에 따르면, 유형문화재의 경우 그 중요도에 따라 국보와 보물로 분류되고, 기념물은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로 분류된다.

 

그렇다면 왜 포석정이 사적 1호일까?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든다. 흔히 포석정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유상곡수(流觴曲水)의 대명사이기 때문이다. ,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주연을 벌이는 이미지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러한 포석정의 이미지는 일본이 삼국유사 기록을 왜곡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대문이 국보 1호가 되고, 동대문이 보물 1호로 지정된 것에도 일재의 잔재가 남아 있다.

 

1933년 조선총독부는 조선 문화재에 대한 전수 조사를 실시해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을 공포한다. 그리고 남대문을 보물 1호로, 동대문을 보물 2호로, 포석정을 고적 1호로 지정한다. 식민지 조선은 국보를 소유하는 것이 불가하기 때문에 보물로 지정한 것이다.

 

해방 이후 1962년 문화재법이 제정·공포되는데, 이때 당시 일제 강점기의 행정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달라진 것은 보물 1호가 국보 1호로, 보물 2호가 보물 1호로, 고적 1호가 사적 1호로 명칭이 달라진 것뿐이다.

 

그렇다면 일제는 왜 남대문과 동대문을 보물 1, 2호로 지정했을까? 그것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숭례문으로 한양에 진입했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흥인지문으로 한양에 진입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포석정이 고적으로 지정된 것 또한 일본의 의도가 숨어 있다. 일본은 포석정을 고적으로 지정하면서 조선의 역대 군왕들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어도 즐거움만 탐닉하다 멸망을 자초했다는 측면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이처럼 무능한 조선인은 식민 지배를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 삼국유사에 따르면, 9279월 신라 공격을 위해 군대를 일으킨 견훤은 10월 영주, 영천 점령 후 11월 경주, 서라벌에 입성한다. 그런데 당시 기록은 모두 음력이기 때문에 실제 견훤의 경주 입성 시기는 12월이다. 한 겨울에 신라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다 견훤의 공격을 받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게다가 포석정에는 정자도 없다.

 

실상 신라 경애왕은 매년 2회 신라 시대 대표 화랑인 문노의 사당이 있는 포석사를 방문해 참배하곤 했다. 당시 신라는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화랑정신을 이끌어내기 위해 문노를 모신 포석사를 방문한 것이다.

 

참배 이후 경애왕은 포석정터에서 원로들과 담소를 나무며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런데 일본은 이러한 사실을 자기들 입맛대로 왜곡해 포석정의 실제 역할과 달리 유흥을 즐기는 부정적 장소로 포석정의 이미지를 만든 것이다. 식민사관을 심기 위한 교묘한 일본의 노림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앞에 무비판적으로 기존의 것들을 수용하기만 했던 삶의 자세를 반성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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