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떠나는 여행] 부산 가덕도 '외양포 마을'

일제강점기 품은 100년 역사 고스란히 간직하다

박인수 기자 | 기사입력 2020/06/21 [17:06]

[사진으로 떠나는 여행] 부산 가덕도 '외양포 마을'

일제강점기 품은 100년 역사 고스란히 간직하다

박인수 기자 | 입력 : 2020/06/21 [17:06]

부산 가덕도 끝에 자리하고 있는 외양포 마을은 100년이 넘은 일제군의 포진지와 일본의 가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 외양포마을로 가는 길목의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남해바다     ©박인수 기자

 

가덕대교를 올라서서 몇 분을 못가 거가대교 톨게이트를 들어서기 전 외양포로 가기 위해 가덕도로 빠져서 10여분을 가면서 남해바다와 거가대교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곧 이어 도착하는 외양포마을의 일본군 포진지는 100년을 넘게 그 외형을 유지하고 있다.

 

▲ 일본군 포진지의 탄약고와 막사     ©박인수 기자

 

▲ 부산 앞바다를 향해 곡사포가 있던 포좌의 흔적     ©박인수 기자

 

이 곳 포진지는 한일합병을 근거로 1904년 강제로 조성한 군사시설이고, 러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부산 앞바다를 향해 곡사포를 설치했던 곳이다. 엄페용 막사 2개소, 탄약고 3개소와 타약고 사이에 곡사포 4기를 설치했었다. 포진지는 은폐를 위해 흙과 대나무 등을 심어 놓았다.

 

특히 탄약고는 설계에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남아 있는데, 외벽은 외부에서 포탄이 떨어져도 내부 탄약에 영향이 안가도록 두껍게 쌓았고, 내부는 습기가 생기지 않도록 내벽에 회칠을 하여 관리했다.

 

또한 탄약고의 바닥은 중앙에서 외벽으로 구배를 주어 습기가 생겨도 외벽쪽 수로로 흐르도록 설계했고, 수로는 외부로 물이 흐르도록 설계되었다. 뿐만 아니라 열기에 약한 포탄은 열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설계되어 날씨가 더운 여름에도 내부의 온도는 시원하게 유지되도록 지었다.

 

▲ 100년이 넘은 일본식 가옥이 그대로 남아 있는 외양포 마을  © 박인수 기자

 

45년 길었던 일체 강점기에서 벗어나 쫓겨났던 주민들이 다시 이곳을 찾았다. 이때 일본군이 사용하던 사령관실과 일본군 막사를 그대로 사용해 정착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주민들이 다시 들어올 때 미리 조사를 하고 30가구 정도 미리 신청을 받았고, 제비뽑기를 해서 각자의 살집을 결정하되 누구도 불만이 없기로 하고 결정되었다고 한다.  

 

그 중 일본군 사령관실로 이용되었던 건물은 내부에 화장실도 있어 인기가 많았다는 후문이다. 일본군 막사로 사용되었던 곳은 막사 크기에 따라 2가구 내지 3가구로 나누어서 내부에 벽만 세운 채 한 지붕 세 가구로 살게 되었고 그 모습 그대로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 일본군 막사를 그대로 사용하고 내부벽으로 가구를 나누었다  © 박인수 기자

 

▲ 지붕의 색으로 세대가 다르다는 것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 박인수 기자

 

또한 일본식 건물의 특색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지붕은 우리나와의 둥근 곡면의 기와와 다르게 일본식 평면기와를 이용한 물결형태의 지붕으로 건축되었고, 처마가 우리나라에 비해 짧아 창틀 위에 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처마를 별도로 설치하는 것도 일본식 가옥의 특징이다.

 

▲ 일본식 가옥의 특징이 일부 남아 있다  © 박인수 기자

 

▲ 일본식 기와 형태  © 박인수 기자

 

▲ 동네에 남아 있는 100년이 넘은 우물  © 박인수 기자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면 동네 곳곳에 우물이 남아 있고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총 4개소의 우물이 있었고, 그 중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는 우물이다.

 

▲ 외양포마을 중턱에서 보이는 모습  © 박인수 기자

 

일제 강점기에 힘들지 않은 곳이 어디 있었을까. 그 시절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고, 100년이 넘은 지금도 이곳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당시의 아픔을 안고 평화를 기원하는 외양포마을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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