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는 살아 있다

정의정 기자 | 기사입력 2020/06/27 [11:20]

노예제는 살아 있다

정의정 기자 | 입력 : 2020/06/27 [11:20]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질식해 죽은 흑인 조지 플로이드사망 사건으로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논란이 들끓고 있다. 아프리카 흑인을 데려다 노예로 부렸던 과거 역사의 흔적을 아직도 지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 사회를 비판하기 전에 우리의 삶은 어떤지 성찰해볼 필요도 있다. 다양한 이유로 타인을 얕잡아 보며 물리적, 언어적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아직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많은 근로자들에게 물리적, 정신적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아무리 Service라는 단어가 노예, 자유의 신분이 없는 주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Servus’에서 유래되었다지만, 라틴 시대도 아닌 현대에 Servus는 계속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과거 로마시대 주인에게 봉사하는 노예의 처지를 ‘Servitium’이라고 불렀다. 이는 현대의 Service와도 연결되어 있는 개념인데, 당시 노예는 주인에게 예속되어 주인에게 충성과 봉사를 다해야만 했다.

 

당시 노예는 일종의 재산이었기에 노예들은 주인을 위해 출산의 의무까지 감당해야 했으며, 수많은 유형의 폭력을 감수해야만 했다.

 

심지어 로마법에는 채찍 소모자를 뜻하는 ‘Flagritriba’라는 단어도 등장한다. ‘새 채찍을 구하게 만드는 하찮은 존재’, ‘아무리 때려도 채찍이 모자란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그만큼 주인은 노예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이를 통해 과거 노예제에는 인간의 야만스러운 본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 본성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동하면서, 우월과 평등을 끊임없이 나누며 지배와 복종 관계를 확립하고자 하는 구별짓기 본능으로 나타나고 있다. 마치 미국의 프로이드 사건과 같이!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라고 헌법에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여전히 이러한 구별 짓기가 근절되지 않고 있는 모습 속에서 여전히 노예제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바로 강자가 약자에게 폭력을 휘둘러도 된다고 여기는 모든 곳에 노예제가 살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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