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으로 본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3>

박현서 대중문화평론가 | 기사입력 2020/12/30 [13:21]

바둑으로 본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3>

박현서 대중문화평론가 | 입력 : 2020/12/30 [13:21]

사실 바둑만큼 한국과 일본 및 중국의 위상이 급변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도 드물다. 한국은 전자, 철강, 조선, 반도체 부문에서는 일본을 앞서고 있으며 자동차, 기계 부문도 일본과의 격차는 거의 없다. 이러한 하드 파워 분야뿐만 아니라 K-POP으로 대변하는 소프트 파워도 일본을 압도하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바둑으로 바라본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에 대해서 살펴본다.<편집자주>

 

 

 

철의 수문장 네웨이핑(섭위평)

 

이야기를 잠시 과거로 돌려보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한국과 중국에서도 일본을 본떠 기단이 형성되었다. 일본이 한국은 무시했지만 중국은 무시하지 않았다. 늘 뭔가 도우려 했고 가르쳐 주고 싶어 했다.

 

그 결과, 일본과 중국은 1960년대부터 교류전을 가졌다. 교류전은 당연히 일본이 앞섰지만 그 차이는 점점 좁혀졌다.

 

일본은 1984년 중일 슈퍼대항전을 개최했다. 대회는 연승전 방식으로 각 국가가 1명씩 출전해 지는 쪽은 다음 선수가 나오고 이긴 국가에서는 승리한 선수가 계속 두는 방식이다. 3회 대회까지는 중국, 일본 각 9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1984년 제1회 대회에서 중국의 네웨이핑이 마지막 주자로 나와 일본 기사 3명을 연파해 중국이 우승했다. 1985년 2회 대회에서도 역시 네웨이핑이 마지막 주자로 나와 남아 있는 일본 기사 5명을 모조리 격파했다.

 

이에 일본 바둑계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출전한 일본 기사 9명은 단체로 삭발을 하며 일본 국민들에게 사죄했다. 조치훈은 일본 기원의 소속이지만 한국 국적이라 출전을 하지 않아서 삭발의 수모는 당하지 않았다.

 

3회 대회마저도 네웨이핑이 마지막 주자로 출전해 일본의 마지막 남은 선수를 꺾고 중국에 우승컵을 안겼다. 이후 네웨이핑에게는 '철의 수문장'이라는 칭호가 생겼다.

 

중일 슈퍼대항전 이전에는 일본의 7대 기전이 국내기전이었으되 세계 기전 급의 대우를 받았고 일본의 최강은 다들 세계 최강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한국에서는 이름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기사가 일본의 일류 기사들을 전부 격파해버리자, 바둑 애호가인 대만의 재벌 잉창치는 묘한 생각을 했다. ‘네웨이핑의 기량이 전성기일 때 세계 바둑 대회를 만들어 중국인이 바둑에서 세계 최강임을 전 세계에 알리자.’ 

 

잉창치가 이런 의도로 세계 바둑 월드컵이라는 응씨배를 준비하자, 현대 바둑의 종주국이라 자부하는 일본이 구경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본 기원은 전자회사 후지쯔의 후원을 받아 1988년 급히 세계 기전을 만들었다. 이렇게 탄생한 최초의 세계 기전인 후지쯔배 세계 바둑 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16명의 초청자 중 3장의 시드를 받아 조훈현, 서봉수, 장두진이 출전을 했으나 전원 초반 탈락했다.

 

우주류란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대세력 바둑으로 지명도가 높았던 다케미야 마사키가 우승하며 일본은 중일 슈퍼대항전에서 완전히 구겨진 체면을 다소나마 만회할 수 있었다.

 

조훈현의 설욕

 

후지쯔배가 열린 직후 바둑올림픽이라 불리는 제1회 응씨배 바둑선수권 대회가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조훈현 혼자 출전했다. 주최측에서는 한국 바둑의 수준을 대만보다도 낮게 보았던 것이다. 한국 기원은 격렬하게 항의를 했으나 바뀐 것은 없었다.

 

단기필마로 출전한 조훈현은 8강에서 새로운 일본 1인자, 고바야시 고이치를 꺾고 4강에서 이중허리 린하이펑(임해봉)을 침몰시켰다.

 

조치훈도 출전했다. 일본 기원소속으로 출전한 조치훈은 8강에서 네웨이핑에게 쓰러졌다. 한국에서는 조훈현의 대국 전 경기를 TV로 생중계했고, 바둑을 모르는 국민들도 조훈현의 승리를 기원했다. 조훈현은 북경과 싱가포르에 걸쳐 개최된 결승전 5번기에서 네웨이핑을 3:2로 격파하고 한국 바둑의 위상을 단박에 끌어 올렸다.

 

대한민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던 시절, 세계 전자 제품 시장을 군림하는 삼성과 LG의 이름이 생소하고, 자동차 생산대수, 세계 3위 현대가 가장 싸구려 차로 미국에 처녀 수출을 하던, K-POP이라는 단어는커녕 우리의 가왕 조용필이 일본 NHK에 출연했다는 이유만으로 화제가 되었던 시절, 조훈현이 바둑올림픽이라 여겨지는 제1회 응씨배에서 그 당시 세계 최강이라 자타가 공인하는 네웨이핑을 격침시키고 우승하자, 전 국민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조훈현은 귀국하자, 김포 공항에서 카퍼레이드를 했다. 국가 주도의 카퍼레이드는 조훈현이 마지막이다. 카퍼레이드의 차 위에서 두 손을 흔들며 그는 조치훈에게 졌던 그날을 회상했을까!

 

한국 바둑의 황금시대

 

 조훈현(왼쪽)과 이창호의 대결    사진: 유튜브 캡쳐 © 뉴스다임

 

필자는 한국 바둑의 황금시대를 조훈현이 응씨배에서 우승을 한 1989년부터 2006년까지로 생각한다. 바둑황제 조훈현과 잡초 서봉수가 한국 바둑의 위신을 격상시켰고 무려 16년 동안 세계 랭킹 1위로 군림한 세계 최강 이창호가 선봉에 서고, 세계 최고의 공격수 유창혁이 허리를 든든히 받치고 있었으며, 4천왕의 쇠퇴기에 새로운 세계 1인자 센돌, 이세돌로 세대교체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 대항전의 결과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국가 대항전의 효시인 1992년부터 5년 동안 개최된 진로배 세계 바둑 최강전과 진로배의 바톤을 이어받은 농심신라면배 세계 바둑 최강전에서 대한민국은 2004년까지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일반 국제 기전도 4천왕이 휩쓸다시피 했고, 바둑올림픽이라 불리며 4년마다 개최되고 세계 기전 최고액의 우승 상금이 걸린 응씨배의 우승자 면면을 보아도 그렇다. 1회 조훈현, 2회 서봉수, 3회 유창혁, 4회 이창호, 6회 최철한으로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 바둑은 이론의 여지가 없이 세계 최강이었다.

 

세계 최고의 공격수, 유창혁 등장

 

조훈현이 1988년 응씨배에서 필마단기로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 국내 기전인 대왕전에서 유창혁이 조훈현을 누르고 첫 타이틀을 획득했다. 1966년생인 유창혁은 '일지매'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최정상급 세계 기사들 사이에서 보기 드물게 수려한 외모를 자랑했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은 세계 최고의 공격수이다.

 

그는 ‘너 죽고 나 죽자’식의 마구잡이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급소를 감각적이며 효율적으로 공략해 만신창이로 만드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창호는 '바둑의 신'이라 불릴 정도의 절대 강자였지만 전투를 즐기지는 않아 유창혁의 공격적인 바둑은 인기도 높았다.

 

일본의 한 프로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바둑에 질이 있다면 유창혁의 바둑이 질로는 최고일 것이다.”

 

유창혁은 3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나 천재적인 기량으로 초등학생 때부터 아마추어 대회를 우승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중학생 시절 3년을 허송으로 보냈다.

 

1984년 고교 2년생인 유창혁은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세계 아마 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대국자 가운데 일본의 히라다는 일본의 아마바둑 4천왕 중 1인으로 수십 년간 명성을 떨쳐왔다.

 

그가 유창혁에게 완패한 이후 인터뷰 내용이다.

“내 평생에 이렇게 강한 아마추어는 처음 보았다. 어떻게 이런 아이가 아마추어일 수 있다는 말인가. 한국의 아마추어는 도대체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유창혁은 결승전도 필승의 바둑이었으나 어처구니없는 끝내기 실수로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그는 군 복무 때에도 프로기사로서 배려를 제대로 받지 못해 또 2년을 허투루 보내야 했다. 그가 유년기 3년과 군 복무 2년을 더욱 바둑에 정진할 수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마음은 많은 바둑계 인사들이 가지는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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