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정의 세상 들여다보기]애벌레에서 나비로 날아오르려면

최현정 기자 | 기사입력 2016/07/08 [15:39]

[최현정의 세상 들여다보기]애벌레에서 나비로 날아오르려면

최현정 기자 | 입력 : 2016/07/08 [15:39]

인권운동가이며 작가로 활동했던 트리나 폴러스는 그의 저서『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에서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성공이라는 목표 하나만을 바라보면서 그저 남을 밟고 기어 올라가는데 급급해 존재 가치를 상실한 인간을 '애벌레'로 비유했다.

 

가치를 상실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상의 목표를 '벌레기둥'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기둥은 끊임없이 남을 밟고 올라서야 하는 치열한 경쟁과, 나부터 오르고 보자는 이기주의와 힘없고 약한 자를 견디기 힘들게 만드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다.

 

이 기둥은 밑에서 보았을 때만 대단해 보일 뿐 막상 오르고 나면 그 꼭대기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을 벌레들은 알지 못한다.

벌레는 구조적 특성상 멀리 보지 못하는 근시안과 높이 오르려면 기어서 가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획일적이고 편협한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살아온 방식이 옳다고 여긴다. 자기가 맞게 가고 있는 것인지 방향을 따지기보다 어서 빨리 가고 보자는 속도에 더 집착하는 경향 때문에 자기성찰, 동료애, 따뜻한 배려와 소통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볼 시간도, 그럴 여유도 없다. 그것은 속도를 내는데 방해만 될 뿐이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비인간화된 벌레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이들이 적지 않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이런 류의 사람들과 마주친 대가는 혹독하다. 단순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그런 사람을 만나는데서 그치면 다행이지만 피할 수 없는 조직세계에서 운명처럼 만났는데 하필, 치명적인 해를 주는 독충과 같은 성깔있는 사람을 만났다면 정말 이처럼 불행한 일이 또 있을까.

 

이런 사람들이 끼치는 해악은 비인간적인 대우와 모멸감 그리고 수치심을 일으키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를 견디지 못해 삶을 포기하게 하고 목숨까지 잃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모순과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사람들이 쌓아올린 허상의 기둥이 쉽사리 해체되지 않는 까닭은 겉으로는 빛나는 스펙으로 무장하고 있으면서 조직이 추구하는 성과주의에 부합하는 실적을 내기만 하면 그 외의 것은 그다지 문제 삼지 않는 그릇된 관행 때문이다.

 

우리사회에는 최근 들어 벌레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이른바 ~()이라 불리는데, 자신의 아이만을 귀하게 여기는 비뚤어진 모성 '맘충()', 극우적인 편향성을 가지고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일베충(), 여성에 대한 우월의식을 가진 가부장적인 한국 남성을 가리키는 한남충()’, 잘난 척하면서 매사 설명을 하려 드는 설명충(), 사소한 일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진지충(), 특정 기업의 제품만 추종하는 삼엽충() 등등 그 명칭도 다양하다.

 

과거에도 물론 일벌레, 공부벌레 같은 말은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 의미가 한 가지에 빠져 몰두하는 부류를 가리키는 애칭 정도였다면 오늘날은 경멸과 비난이 담긴 공격성을 탑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런 사회적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인간의 존엄성이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고, 널리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사회적 관용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반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벌레와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위에 언급했던 작가의 말을 빌면, ‘나비가 되어 사는 것이다. 나비가 되는 길만이 인생의 진정한 해답을 찾을 수 있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비가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까.

 

첫 번째, 현실의 문제의식을 자각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미도 모른 채 붙들고 놓지 못하는 벌레기둥에서 내려와야 한다. 연민과 공감과 사랑이 없는 그 비정한 세계로부터는 아무 배울 점이 없을뿐더러 가장 높은 곳에 올라도 과정 중에 온갖 소중한 가치를 모두 희생시키고 왔기에 더 이상 누릴 보람과 가치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벌레의 생각을 뛰어넘는 나비식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벌레는 높이 오르려면 기는 방법뿐이니, 밟고 경쟁하는 것만이 살 길이다라고 주장하지만 나비는 기는 것은 한계가 있으며, 이를 초월하여 저마다의 잠재력을 발견해 날아올라야 모두가 산다고 한다.

 

세 번째, 두렵지만 새로운 도전을 시도해야 한다. 익숙한 벌레의 삶을 버리고 미지의 나비의 세계로 가려면 모험이 필요하다. 물론 나비가 되어도 시련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닥친 모든 문제의 답을 땅에서만 찾을 수 있을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벌레들이 치러야야 할 지상전과 나비의 공중전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나비는 훨씬 독립적이고 창의적이며 선택의 폭이 넓은 까닭에 생명의 안정성이 높은 동시에 자유롭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간으로 태어나 벌레와 같은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물질주의와 경쟁, 성과주의에 매몰된 인간은 그 존엄한 가치를 상실한 채 낙오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힘겹게 살고 있다.

 

벌레와 같은 삶이 아닌 나비가 되어 사는 방법이야말로 잃어버린 가치를 되찾으려는 간절한 소망과 고민의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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