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선정 '2021년 세계기념 인물' 김대건 신부

안석필 제반명칭연구가 | 기사입력 2021/05/06 [08:47]

유네스코 선정 '2021년 세계기념 인물' 김대건 신부

안석필 제반명칭연구가 | 입력 : 2021/05/06 [08:47]

유네스코는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은 김대건 신부를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 

 

먼저 김대건 신부의 이름에 담긴 뜻을 살펴보면 어렸을 때 초명[初名(兒名)]인 재복(再福)은 거듭(再) 복(福)자됨으로도 뜻을 발휘하나 성 김대건 안드레아가 사제 기념으로 성당이 건립된 1928년 당시 이곳을 ’복자(福者) 기념성당‘이라고 했다. 이후 불명확한 시기에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 경당’으로 일컫다가 1984년 성 요한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복자 기념성당으로 재복(再福)된다.

 

보명(譜名)이라고 하는 족보상의 이름은 지식(芝植)이다.  증조부, 조부가 천주교를 위해 피를 뿌린 집안에서 태어났듯 족보상의 이름이 지초(芝)를 심는다(植)는 지식(芝植)인데 옛날에는 지초의 뿌리를 염료로 이용해서 짙은 남빛을 띤 붉은색의 옷인 자색옷을 지었다는데, 이 옷은 상위의 왕과 군인, 승려 등으로 사용이 제한했다. 이 이름은 결국 순교자의 길을 가는 뜻이 담긴 것이다.

 

세례명은 세례(洗禮) 때에 붙는 이름으로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나 성인의 이름을 붙이는데 김대건 신부의 세례명은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안드레아(Andreas)이다.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 동상     사진제공: 천주교 성아우구스띠노 수도원 신부   © 뉴스다임 

 

안드레아는 사도 성 베드로의 동생이며 역시 어부였다.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솔뫼도 바닷가이고 선교활동시에도 서양 성직자가 국내 잠입할 수 있는 백령도와 연평도 해역 인근에서 중국 어선을 이용해 해로를 개척하다가 순위도에서 체포되었듯 신부로 서품된 후 본토로 뱃길로 도착했듯 바닷가와도 인연이 많은 세례명이다. 

 

관명(冠名)은 20세 성인되었을 때 항렬에 따라 새로 지은 이름으로 대건(大建)이다. 하나님(一)께서는 인간(人)을 이 세상 다른 어느 존재물보다 가장 큰 (大) 대상체로 태어나게 하셨고, 이에 대한 가르침을 위해 천주교 사제(大)로 세움(建)을 받게 되었고 붓(聿)으로 31통의 편지를 써서 해외로 멀리(廴) 보내기도 했다.

 

박해시대에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이며 성직자들의 대주보로도 우러러 보기에 김대건 신부가 거쳤던 곳마다 성지로 조성됐다.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21일(1세)에 면천군(현 당진시) 솔뫼(松山, 소나무가 우거진 산)에서 탄생했고, 이곳은 솔뫼성지가 되었다.

 

1836년(16세)에는 용인 한덕골(現 한덕골 성지) 모방신부로부터 총명함과 장차 교회 목자의 재목감으로 눈에 띄어 신학생에 발탁됐다. 은이(隱里, 숨어 있는 동네 마을)는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서 숨어 살던 곳(現 은이 성지)인데 은이공소에서 세례성사와 첫 영성체식을 받은 후에 중국 마카오로 떠났다.

 

1837년(17세)부터 1842년(22세)까지는 중국 마카오에서 5년간 선교사들에게 신학문을 배웠는데 한국인 최초의 유학생으로, 라틴어와 프랑스어, 중국어를 구사하고 서양음악, 그림 등을 배우고 활동한 국제인이자 여행가이기도 했다.


마카오는 사원의 이름인 마쭈거(媽祖閣)를 잘못 알아들어 포르투갈인이 마카오라고 부르며 이후 금, 은, 도자기, 아편 등의 중개무역과 기독교 포교의 기지로서 번영했던 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1842년(22세)부터 1846년(26세) 8월까지 31통의 서한, 훈춘기행문, 조선전도, 조선순교사와 순교자들에 대한 보고서 등 각종 집필 및 편지를 작성했다.

 

1844년(24세)말경에는 사제(司祭 : 주교와 신부를 통칭) 서품(성직 수여절차) 전 단계를 진행했다. 1845년(만24세) 8월 17일 주일에는 중국 상해에서 서품식을 하고, 8월 24일에는 첫 미사를 시행 후 페뢰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조선으로 출항했다.

 

서해 풍랑으로 25일간 해상에서 표류하다가 제주도 용수리(현 용수리성지) 포구에 도착, 2~3일간 정비 후 다시 뱃길에 올라 금강하류 나바위(現 나바위 성지) 위에 도착해 결국 본토에 첫발을 딛게 되었다.

 

김 신부는 1846년(26세) 9월 16일에 새남터(沙南基)에서 순교했다. 이곳은 조선 초부터 군인들의 연무장이었고 이후에는 국사범 등 중죄인의 처형장(성삼문 등의 사육신을 처형)으로 사용된 곳으로 한강변 모래(沙)벌판과 풀과 나무가 나고 있는(남, 南) 곳(基)이기도 하다. 새가 나는(남) 터이기도 한다.

 

새남터 성지는 1801년 신유박해로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했는데 대원군의 섭정으로 1866년(고종3)부터 다시 가톨릭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가 시작된 후 3년 사이에 8천여 명이 순교했다. 이는 세계 종교사상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1846년(26세) 음력 10월 26일 김대건 신부 시신을 한양에서 2백리 떨어진 현재의 미리내 성지로 이장했다. 미리내는 은하수의 순수 우리말로, 시궁산(時宮山, 신선봉) 골짜기마다 흩어져 살던 신앙인들의 집에서 비춰진 호롱불빛과 밤하늘의 별빛이 맑은 시냇물과 어우러져 빛나고 그것이 은하수(미리내)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옛 지명이다.  

 

김대건 신부의 희생은 헛되지 않아 박해를 딛고 한국에서 천주교는 깊이 뿌리내리며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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