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한·중·일 3국, 바둑 강자들의 승부세계를 진단하다<1>'박정환' 편이창호에서 이세돌로 성공적인 세대교체 이뤄지던 2006년 13세에 입단한 '외로운 황태자'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바둑 강자들의 세대 교체가 이루어졌다. 성공적인 세대 교체 이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3국의 바둑 강자들은 누구일까? 그들이 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바둑 강자들의 치열한 승부세계를 살펴본다.<편집자주>
한국 바둑의 최강자 '박정환' 이세돌보다 10살 어린 1993년생인 박정환은 이창호에서 이세돌로 성공적인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던 2006년, 13세의 나이로 입단했다. 불과 1년 뒤 2007년 국내 기전인 엠게임 마스터스챔피언십의 우승으로 한국 바둑계의 미래를 환하게 밝혔다.
이세돌이 세계 바둑계의 정상을 지키고 있던 2011년 메이저 국제 기전인 24회 후지쯔배에서 18세의 나이로 우승컵을 거머쥠으로써 세계 바둑계에 새로운 강자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2013년에는 농심신라면배 연승 바둑 최강전에서 최종 주자로 나와 중국 기사 2명을 연파하고 한국에 우승컵을 안겨줬다.
그러나 박정환의 활화산 같은 기세는 7회 및 8회 응씨배에 연이은 준우승으로 크게 꺾여 버렸다. 무엇보다 박정환의 심적 부담을 덜어줄 이인자의 부재가 한국 바둑을 이끌어가는 그에게 더욱 큰 어깨의 짐이 되었다.
이창호에게는 조훈현과 유창혁이 있어 설사 이창호가 중간에 낙마를 하더라도 조훈현과 유창혁이 번갈아 국제 기전 우승을 하였고 이창호에게 상대적으로 강점을 보이는 요다 같은 외국 기사는 유창혁과 조훈현이 이창호와 만나기 전에 중간에 탈락을 시켜 이창호의 세계 기전 사냥에 큰 도움이 되었다. 조훈현과 유창혁과 같은 강력한 존재감을 지닌 이인자는 아니었지만 이세돌에게는 그나마 이창호라도 있었다.
이창호의 전성기 후반은 이세돌의 전성기와 시기가 비슷하여 세계 기전을 양분할 정도였기에 이세돌 입장에서는 마음 편히 일인자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고, 2007년 이후 이창호의 9차례 메이저 국제 기전 준우승도 한국 바둑계와 이세돌에게는 아쉽지만 도움이 되었다.
즉 9차례 준우승의 상대방 중 3번은 한국 기사였기에 중간에 중국 강자들을 탈락시키며 최소한 한국 기사들만의 잔치상으로 만들어 주고 이세돌 혼자 본선 8강, 4강에서 모든 짐을 지우게 하지는 않게 하였다는 의미가 깊다.
외로운 황태자 '박정환' 박정환은 신공지능 신진서의 출현 이전에 철저히 혼자였다. 2014년 삼성화재베에 김지석, 2016년 LG배에서 강동윤이 우승했을 뿐이다.
메이저 국제 기전은 대부분 대회 주최자의 의도에 따라 본선 64강이나 32강, 24강으로 국내 기사들 및 해외 기사들을 초청하여 대회를 개최한다. 그런데 16강이나 8강에 올라가면 살아남은 한국 기사들은 몇 되지가 않았다.
그러니 중국 기사들의 목표는 오로지 박정환일 수밖에 없었다. 각국의 기원은 자국 기사를 위해 우승이 유력한 상대 기사의 기풍, 단점, 약점을 연구하고 공부한다.
그런데 본선 8강에서 살아남은 한국 기사들은 몇 안되었고 그나마 우승 전력을 갖춘 기사는 박정환밖에 없으니 중국 기사들은 박정환만 집중적으로 연구했고 박정환은 더욱더 힘든 상황에서 악전고투를 할 수밖에 없었다. (2010년대 당시 세계 바둑계에서 일본의 존재는 완전한 들러리에 불과할 정도로 처참했다. 2000년대에는 대만과 한국 국적의 일본 기원 기사들(조치훈, 왕리청, 장쉬)이 띄엄띄엄 메이저 국제 기전에 우승했지만 2010년대 이후로는 단 한 명의 기사도 메이저 국제 기전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반대로 2010년대 중반 중국에는 세계 랭킹 1위 커제를 비롯해서 미위팅, 탕웨이싱 등 우승 가능한 전력을 가진 중국 기사의 숫자가 20명에 육박하다보니 박정환 입장에서는 누구 하나를 중점적으로 연구와 공부를 할 수 없어서 설상가상인 입장이었다.
게다가 박정환은 이창호, 조훈현, 이세돌 같은 불세출의 천재기사가 아니었다. 이는 박정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여지껏 한국 바둑계가 중국과 일본에 비해 너무나도 얕은 인재풀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행운과 뛰어난 민족성을 가졌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해석이 있을 수가 없다.
박정환의 메이저 국제 기전 5회 우승도 대단한 기록이다. 이 기록을 넘는 기사는 세계를 통틀어 이창호(17회) 이세돌(14회) 조훈현(9회) 구리(8회) 커제(8회) 유창혁(6회) 이들 6명 뿐이다. 박정환이 이창호나 이세돌과 같은 환경이었으면 메이저 대회 5회의 우승은 아마 7회나 8회 이상이었을 것이다.
바둑 외적인 환경 영향도 매우 크다. 1990년대 후반에 밀어닥친 e스포츠의 열풍은 청소년 바둑 인구의 감소에 치명타를 입혔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한국의 신생아 숫자마저 급격히 줄다보니 그렇지않아도 옅은 한국 프로바둑 기사의 인재풀은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바둑의 인기는 급격히 식어갔고 국내 대형 기전들은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국수전을 필두로 상당수 폐지되었다. 대중적인 인기와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기사들도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로 이어지다 이세돌이 마지막이었다. 게다가 메이저 국제 기전에서의 상대적으로 초라한 한국 기사의 성적에 대한 바둑팬들의 맹렬한 질타는 박정환에게 집중되었다.
박정환의 바둑세계 박정환의 바둑은 특별히 강점이나 약점을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바둑이다. 포석, 행마, 수읽기, 형세 판단, 끝내기 어디 하나 부족한 곳이 없지만 그만큼 자기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바둑을 둔다.
전신 조훈현처럼 바둑이 불리하면 판을 뒤흔들고 또 다른 별명인 조제비처럼 발 빠른 행마를 보이지도 않고 이창호같이 중반의 두터움을 끝내기로 이어가는 장점이 크게 돋보이지 않는다.
이세돌의 특기인 뛰어난 수읽기를 바탕으로 초반, 중반, 끝내기의 모든 상황에서 상대방을 휘몰아치지도 못한다. 이러한 두리뭉실한 박정환의 바둑은 장점이 될 수도 있고 약점이 될 수도 있다.
박정환은 마지막 타이틀 홀더로서 인연이 깊다. 후지쯔배는 일본이 만든 최초의 메이저 국제 기전이지만 초반 5회를 제외하면 한국 기사들이 대부분 우승함으로써 2011년 24회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는데 그 회 우승자가 박정환이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자랑하는 국수전은 조남철 대국수, 김인 국수, 조훈현 국수 등 당대 일인자의 계보를 이어갔으나 2016년 59회 박정환 국수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마이너 국제 기전인 중국 주최 CCTV 하세배 한중일 쟁패전은 6, 7, 8회 3연속 박정환이 우승했는데 2020년 8회를 끝으로 현재 중단된 상태이다.
박정환은 메이저 국제 기전 우승은 5회에 불과하나 마이너 국제 기전은 메이저 국제 기전 우승에 비교해서 비교적 많이 우승해 바둑팬들의 원성을 상당 부분 어루만져 주었다.
이창호와 이세돌의 마이너 국제 기전 우승횟수가 4회인데 비해 박정환의 마이너 국제 기전 우승횟수는 무려 8회에 달한다.
이는 2010년대 이후 비용은 적게 들고 홍보 효과는 큰 마이너 국제 기전이 몇 개 생긴 원인이 첫 번째 이유고 마이너 국제 기전은 보통 32강전이 아닌 한국, 일본, 중국의 대표 기사 한두 명만 초대되다 보니 중국 기사들의 인해전술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두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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